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양 사태 (문단 편집) === 참사 === ||[[파일:大饑荒-3@1200x1200.jpg|width=100%]] [[파일:p2935134a507455266.jpg|width=100%]] [[파일:20170322091818936.jpg|width=100%]]|| 겨우내 식량이 바닥난 주민들이 죽기 시작, 급식소는 폐단으로 문을 닫았기에 주민들은 음식을 구할 수 없었다. 허난성 서기 우즈푸(吳芝圃)와 신양지위 서기 루셴원(路憲文)은 상황이 새나갈까 걱정해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농민들은 불을 피워 밥을 짓지 말고, 밥도 나가서 구하지 말고,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지 마라. 루셴원은 민병대를 파견해 마을을 봉쇄, 거리와 교통 요로에 관문을 설치해 피난민을 '적성계급', '탈주범'으로 간주하고 체포해 고문한다. 겨우내 46만여 명이 피난중 체포되고 상당수가 맞아죽거나 아사, 때문에 주민들은 집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극소수는 목숨걸고 탈출한다. 많은 이들이 허난성 정부가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해 허난성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구조를 요청하나 그들은 모두 '우경 반동분자'로 규정되어 체포, 비투회에서 모진 탄압을 받아 죽는다. 루셴원은 일신의 화를 피하고자 회의를 계속 열어 장거리 전화와 우편을 엄격하게 검열, 편지를 압수하고 수신자를 체포한다. 주민들은 구조를 기대할 수 없자 살인, 식인까지 한다. 부모는 아기, 자식은 부모를 먹고 병자나 장애인은 자살을 강요당하고 온몸이 찢겼다. 이때 신양 정부 창고엔 식량 11억 근이 있어 신양지위 부서기 장수번(張樹藩)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 그렇게 많은 인민이 죽었지만 식량은 정부 산하의 크고 작은 식량 창고에 가득찼다. 그러나 인민들은 굶어죽을지언정 이를 약탈하지 않았다. 이는 당과 피, 살로 맺어진 인민이 얼마나 말을 잘 듣고, 법을 잘 지키고, 당을 믿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 지도 간부는 정말 부끄럽다. 그러나 이는 주민들이 법을 잘 지켜서가 아닌 힘이 없어서였다. 주민들은 이듬해 심을 종자까지 빼앗기는 등 생존권을 철저히 박탈당했고, 민병대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가혹히 처벌하니 누구도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루셴원은 여전히 태연해 1959년 11월 한천에서 차를 몰고 지구위로 갔을 때 부모가 버린 아이들, 길가의 시체, 식량을 요구하는 이들을 무시,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도시 기관, 공장, 기업소는 농촌에서 온 사람을 일체 수용하지 마라. 또 관청에 무장 경비대를 세워 혹시모를 민란에 대비, 그동안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일부 현의 비정상적인 사망건수는 몇년간 계속 발표된다. 한천은 5만 6천여 명이 사망, 시와 회빈은 각각 10만 7천여, 9만 8천 명으로 인구 1/4이 죽었다. 당시 장수번의 비서 위더훙은 회빈 출신으로 보름 동안 아버지, 어머니, 백부, 백모가 차례로 죽었고, 고향 마을 서쪽에서는 굶어 죽은 집이 절반 이상, 시신을 치우지 못한 집이 많았다고 한다. 1960년 2월 내무부는 신양을 시찰, 장수번으로부터 상황에 대한 증언을 듣는다. 위생부에도 허난성 구시현위원회와 허난성 의료대가 시현에서 이미 5만여 명이 죽었다고 보고, 국무원 비서장 시중쉰과 중앙 감찰위원회 [[둥비우]]는 이를 중앙 감찰위원회에 제출해 당국은 7월 허난성 위원회를 개최, 루셴원을 체포하고 신양에 긴급 식량지원을 결정해 사태가 알려진다. 신양지위는 38만이 사망했다 보고하지만 축소보고임이 밝혀진다. 1961년 1월 13일 신양지구는 1959년 11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인구 808만 6526 중 13.2%인 107만 321이 죽었다 보고, 그중 6만 7천은 민병대에 맞아 죽었다. 2012년 난징대는 출생하지 못한 자와 도주자를 합해 신양의 인구 손실을 약 125만으로 추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